조화로운 삶... /산골 이야기

080818 김남조 시

[정선통나무펜션] 2008. 8. 19. 01:44
080818 

 

* 耳順에 - 김남조

1
이순 지났으니
그대 사랑타령도
나이값에 어울리길 빌겠어
걸핏하면
있는 피 죄다 따르어
물동이 채우던
어리궂은 상습의 짝사랑도
그대 몫의 축복에선
기실 최고이던 게야
그 사람들
사랑스러워 주었기에
이제도록 살아남고
가슴 아직 따뜻하니
얼굴 가득 미소지어주렴
너로라 귀한이라
머리 끄득여주렴

2
이순 지났으니
그대 삶타령도
나이값에 합당하길 바라겠어
萬感 다 넘쳐도
들쑤시고 아프지만은 않아
어른이시여
처음 한번 도포자락 잡아보는
평화, 왕림이라
이렇게 되면
식탁의 소금인 격으로
고통이 새로 솟아나겠어
사랑하는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천만 사람이
심령 한가운데서
아리게 붐벼야겠어

눈 내린 저물녘에
은보라빛 어둠 고이는
이 거룩한 무게
삶은 깊을 수록 有情하구나
헌 옷 입은
이순의 여인이여


 
* 생명 -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充電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아이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목숨 - 김남조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 정념의 기 -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 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 그대 있음에 -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설일 -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가 아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로써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바람 - 김남조

바람 부네
바람 가는 데 세상 끝까지
바람 따라
나도 갈래

햇빛이야
청과 연한 과육에
수태(受胎)를 시키지만
바람은 과원(果園) 변두리나 슬슬 돌며
외로운 휘파람이나마
될지말지 하는 걸

이 세상
담길 곳 없는 이는
전생에 바람이던 게야
바람이 의관(衣冠)을 쓰고
나들이 온 게지

바람이 좋아
바람끼리 훠이훠이 가는 게 좋아
헤어져도 먼저 가 기다리는 게
제일 좋아

바람 불며
바람따라 나도 갈래
바람가는 데 멀리멀리 가서
바람의 색시나 될래


* 밤이 오기 전 - 김남조

끝없이 내려만 가는
층계는 무서워
맹세하듯 절망을 피해 울리는
먼 풍금 소리에 운다.

나야 쉽사리
종이집을 불태운
지등(紙燈) 안
벌거벗은 불송이가 돼 버리곤
엄청난 바람에 놀라며
사위(四圍)의 어둠을
도저히 혼자서는 다 껴안지 못한다고
지레 근심하곤 한다

태양이 버린
우기(雨期)
비 비린내 몹시 나는
나무들,
그 헝클어진 머리채를 눈으로 빗질하며
고달픈 초록에 또 울어 버린다
정직하기조차 참 어려워서
매양 어두운 건
나의 삶과 시(詩)의 얼굴

진흙 위에 무릎 끓어
빗물 씻어내게
남루한 속마음 도심(禱心)으로 풀고 싶어도
감상(感傷)이 얼룩진
눈물이 흐르는 따위
지금 이런 기도는
날지 못하는 새라고 알고 있다.

하면
밤 오기 전
조금 남은 시간을 어쩌면 좋을까
숱하게 지껄이던 말
사랑이랑 빼놓고
더 간절히 속쓰리게 뭘 하고 있을까
나는


* 낙조 - 김남조

해 저물어서야
당신께 올 수 있었지

울며 두드리던 문에 절망하고
겨울 바닷가
피의 홍수로 번지는 낙조만 바라보네

사랑이란 말은
눈부셔
못만지고
당신과 연분있는 실바람이면
간절히 껴안고 싶었었지

사람에겐 양심이라 부르는
자의식의 율법이 있다
당신의 그마음 열어주지 않으면
오던 길 천만리도 되돌아가는
이는 내 계율인 것을

흐느끼며 잠기는 노을
밤이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수심에
천천히 이 바램을 떨군다.


* 나목의 시 - 김남조

잊어버리리
간절히 두 손으로 받아 보던
흰 눈도 잊었네

정은 제멋대로 박하고
사람은 제멋대로 아쉽고
인생은 아무때나
찝질하고 골똘한 미각(味覺)

잊어버리리
불행한 이가 남기고 간 말도
그 미소도 잊으리
잎새를 떨어뜨리며
서 있는 나무
저 허허로운 낭만의 둘레

성스러운 달과
성스러운 해가
조용히 잔을 기울이고 부어 주는
저것은 무엇일까

세월은 제멋대로 가고
사람은 제멋대로 그립고
인생은 자주
물기 없는 선홍의 단풍

모두 잊으리
간절히 두 손으로 받아 보던
흰 눈도 잊었네


* 미운 마음의 詩 - 김남조

너로 하여 소망을 품은 적 없으니
너로 하여 낙망할 까닭이 없다고
다짐하고
나에게 기쁨을 준 일 없기에
내가 눈물을 살 라 없다고 믿어얄 텐데
길지 않은 인생에서
무궁한 슬픔 어인 탓인가

지내 온 날 갖가지 오뇌가
엷은 유리를 비쳐 보듯 보이는
밝은 눈의 나이에 이르렀는가

나는 추운 마음으로
홀로 예까지 밀려와 있음이려니
그릇을 비워 그득히 새것으로 채우듯
부스러진 꿈의 조각들을 모으면
생명의 바구니에 담아 들고
다시 가야할 텐데

미운 마음의 나무를 심어 준
너를 비껴 서서
미운 마음의 죄를 피하여
멀리 어디론가 떠나야할 텐데
짐짓 나 떠나야할 텐데


* 六月의 시 - 김남조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단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 출발 - 김남조

남은 사랑 쏟아줄
새 친구를 찾아 나서련다
거창한 행차 뒤에
풀피리를 불며 가는
어린 초동을 만나련다
깨끗하고 미숙한
청운의 꿈과
우리 막내동이처럼
측은하게 외로운
사춘기를

평생의 사랑이
아직도 많이 남아
가슴앓이 될번하니
추스리며 추스리며
길 떠나련다
머나먼 곳 세상의 끝까지도
갖고 가리라

남은 사랑
다 건네주고
나는 비어
비로소 편안하리니


* 상사 - 김남조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 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골수에
전화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전에 단 한 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 지를..


* 추풍(秋風)에 부치는 노래 - 김남조

가을 바람이 우수수 불어 옵니다
신이 몰아오는 비인 마차 소리가 들립니다
웬일입니까
내 가슴이 써-늘하게 샅샅이 얼어 듭니다

'인생은 짧다'고 실없이 옮겨 본 노릇이
오늘 아침 이 말은 내 가슴에다
화살처럼 와서 박혔습니다
나는 아파서 몸을 추설 수가 없습니다

황혼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섭니다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은 날들입니다
어쩌면 청춘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연인들이여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은 듯이 지나 버리는 생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꽃밭을 그대 만나거든
마음대로 앉아 노니다 가시오
남이야 뭐라든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밤을 도와 하게 하시오
총기(聰氣)는 늘 지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금싸라기 같은 날들이 하루하루 없어집니다
이것을 잠가 둘 상아 궤짝도 아무것도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낙엽이 내 창을 두드립니다
차 시간을 놓친 손님모양 당황합니다
어쩌자고 신은 오늘이사 내게
청춘을 이렇듯 찬란하게 펴 보이십니까


* 사랑초서 - 김남조

8
말은 잔모래
물결에 쓸리는
돌의 포말
말로썬 못 가는 수평선에
이름으론 못 부를
한 사람 있다

32
더 아파야만이 사랑이래
더 외로워야만이 사랑이래
쌓을수록 남아 도는
천형의 벽돌

53
떫은 사랑일 땐
준 걸 자랑했으나
익은 사랑에선
눈멀어도 못다 갚을
송구함뿐이구나


* 설목 - 김남조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던 사람
이제는 가고 없음이여

미워하면서
나를 미워하면서

이제토록 오래
내곁에 머물러줌이
더욱 백배는 고맙고
마음 놓였을 것을


* 내가 흐르는 강물에 - 김남조

구름은
하늘이 그 가슴에
피우는 장미

이왕에
내가 흐르는 강물에
구름으로 친들
그대 하나를 품어가지 못하랴

모든 걸 단번에 거는
도박사의 멋으로
삶의 의미 그 전부를
후회 없이 맡기고 가는
하얀 목선이다

차가운 물살에
검은 머리 감아 빗으면
어디선가 울려오는
단풍나무의 음악

꿈이 진실이 되고
아주 가까이에 철철 뿜어나는
이름 모를 분수

옛날 같으면야
말만 들어도 사랑과 어지럼병
지금은 모든 새벽에 미소로 인사하고
모든 밤에 침묵으로 기도한다

내처 내가 가는 뱃전에
노란 램프로 여긴들 족하리라

이왕에
내가 흐르는 강물에
바람으로 친들
불빛으로 친들
그대 하나를 태워가지 못하랴


* 밤에 - 김남조

온 밤을
눅눅한 석회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어둠

죽음이 입맞춤할 사람을 찾아
꼬리 긴 바람 같이
서성이는 지도 모르지

후두둑 가슴 떨리는
별, 발가벗은 진실의 몸서리치는 눈짓앞에
참회나 할까부다
사랑한 일만 빼곤
나머지 무엇이나
내 잘못이었으니까

마지막 빵 한 조각으로
旅裝을 꾸리는 나그네처럼
비애마저 하직하면 남은 일은 후련한 告罪
심호흡을 하고 잠들어
내일은 좀더
단순한 햇빛에 깨어나리

알아듣기 쉬운 말로 간간이 얘기하며
맨몸의 눈처럼 살리라
마음 놓고 몸 던지는
순박의 탄생을 닮고 싶어


* 제야(除夜) - 김남조

지금은 잊어버리는 시간이다
잊음을 염하여 눈을 감는 시간이다
부끄러운 이의 기도 시간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그 조마로운 마지막 시간인데
내 마음을 비워
철철 넘치도록
눈물이나 담아 보랴

이를테면
나는 해 묵은 편지
보낼 곳에 보내지 못한채 어언 빛 바랜
봉함 속 기찬 사연을
품기도 했네마는

지금은 다시
기다려 보는 시간이다

젖은 눈으로 묵례를 나누면서
당신과 내가, 저분과 그이가
새론 기다림에 머리 숙이는 시간이다

오는 건 매양 같은 것이라 해도
어쩌면 더욱 나쁜 것이라 해도
씻은 손으로 새 것을 맞아 들이는
匹婦의 낭만이여


* 다시금 그 바다 - 김남조

한바다 수심 아래
물받침 토양에
수중의 청대숲이
울울청청 할거나

그 숲이 뿌리내린
해저의 동산에
물의 혈관 지하수
굽이굽이 흘러라

실타래 풀어서
그 길 따라 가보면
지구는 둥글어
다시금 그 바다


* 행복 - 김남조

새와 나,
겨울나무와 나,
저문날의
滿雪과 나,
내가 새를 사랑하면 새는 행복할까
나무를 사랑하면 나무는 행복할까
눈은 행복할까

새는 새와 사랑하고
나무는 나무와 사랑하며
눈송이의 오누이도 서로 사랑한다면
정녕 행복하리라

그렇듯이
상한 마음 갈피갈피
속살에 품어 주며
그대와 나도 사랑한다면
문득 하느님의 손풍금 소리를 들을지 몰라
보석의 귀를
가질지 몰라


* 나의 언어 - 김남조

나의 언어는
불행히도 위험하지가 않다
오늘 나의 언어는
충격을 동반하지 않으며
과도한 고통을 품지도 않는다
나 자신처럼
이순의 나이 넘어 온
나의 언어는
포도 낟알 액체가 되기까지
시간의 봉인
지켜 기다리잔다
모든 것 말 못할 바엔
침묵의 괜찮은 화법이라거니 하면서
낮은 풍향에
몸 굽혀 드러눕는
풀숲이려고만 한다

이래저래
나의 언어는
다행히도 위험하지가 않다


* 고백 - 김남조

열. 셀때까지 고백하라고
아홉. 나 한번도 고백해 본적 없어
여덟. 왜 이렇게 빨리세?
일곱. .....
여섯. 왜때려?
다섯. 알았어. 있잖아
넷. 네가 먼저 해봐
셋. 넌 고백 많이 해봤잖아
둘. 알았어
하나반. 화내지마 ..있잖아
하나. 사랑해


* 사랑하리, 사랑하라 - 김남조

아니라 하는가
사랑이란 말
아니 비련이란 말에조차
황홀히 전율 이는
순열한 감수성이
이 시대에선
어림없다 하는가
벌겋게 살결 패이는
상처일지라도
가슴 한복판에
길을 터 달리게 하는
절대의 사랑 하나
오히려 어리석다 하는가

아니야, 아닐 것이야
천부의 사람마음
새벽숲의 젊은 연초록으로
치솟아 오름을
누구라 막을 것인가

사랑하리, 사랑하라
그대 영혼 그리고
그대 사랑하는 이의 영혼
충만하도록
그 더욱 사랑하리, 사랑하라


* 나목 옆에서 - 김남조

나목 너의 옆에
나도 나목이란다
맵고 아린 추억에 목욕한단다

빛나는 궁창
눈부심 희석하니 더 자애롭고
겨울나는 꽃대궁이
꽃중의 꽃이어라

나목 너의 옆에
나도 나목이란다
소름끼 포스스 돋는
얼음냉수에
너와 나
밤낮없이 목욕한단다


* 겨울꽃 -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꽃 앞에
오랫 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 되었어


* 비 - 김남조

내 유정한 시절
다 가는 밤에
억만 줄기의 비가 내린다
세월의 밑바닥에 차례로 가라앉는 비
물살 휘저으며
뭉개고 고쳐 쓰는
글씨

내야
예쁜 죄 하나 못 지었구나
저승과 이승, 몇 겁 훗세상에까지
못다 갚을 죄업을
꼭 둘이서 나눌
사람 하나
작정도 했건마는

빗물에 손 씻는다
죄 하나라도 운명 없이는
이루지 못함을

찬미할거나 찬미할거나
오늘은 골수에도 스미는 비를
내 멋대로 찬미할거나
그래 참말이다
피가 더운 여자는
단명이나 했어야 하는 것을


*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한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 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평행선 -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워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본 적도 없지만
둘이 되어본 적도 없습니다.


* 저희는 홀로이 옵니다 - 김남조

고독은 오래된 길벗이면서 매번 서먹한 친구다
오늘밤 나는 고독에도 습기를 입혀 축축하고
연유한 살갗이게 하고 싶다
고독은 신비한 체질을 가졌다
오래된 이름이면서 언제나 청결한 살결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순결성을 달리 찾아 보기란 쉽지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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