뜸사랑의 모토는 ‘배워서 남 주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덜어내면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 구당 선생의 일관된 가르침인 ‘참된 인술은 나눔과 희생’이란 선언을 실천하고 있다. 뜸사랑은 지금 창신동 봉사실을 상설 운영하고 있다. 65세 이상 생활보호대상자들과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열린 공간이다. 국회의사당에도, 과천 정부종합청사에도, 재정경제부 청사에도 침뜸 상설봉사실이 개설돼 있다. 누구든 그곳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구당 선생은 증세에 따라 아예 뜸자리를 펜으로 표시해준다. 한번만 다녀가면 집에서 가족이 서로 떠줄 수 있다. 누가 뜨던 뜸의 효과는 다르지 않다니 이런 편리한 의술이 다 있나. 이런 의술을 만들어 보급하는 ‘민중의료인’의 위대성을 알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수입한 슈바이처만 성자이고 영웅인 줄 알다니, 우리 눈이 너무 어둡고 몽매하다.
“동양 삼국을 다 다니며 침뜸을 비교해봤습니다. 침에 대한 교과서를 만들어야 했거든요. 북한에도 2001년 이후 해마다 갔습니다. 북한은 침을 모르면 아예 의사로 인정을 안하더군요. 허익근 세계침구협회 북한회장을 만나 침뜸 교과서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을 받았어요. 이제 8권이 출간됐습니다. 이제는 내가 죽어도 걱정 없습니다. 아, 공부할 교과서가 있지 않습니까. 여태껏 사람으로 태어나 뭔가 해놓고 죽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 허무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어딜 가든 침뜸 교과서를 만들고 간다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중국 침은 아프고, 일본 침은 너무 약해요. 우리 것이 효과가 가장 좋습니다. 젊은 사람이 침뜸을 배워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21세기 의료 경쟁에서 침뜸이 단연 최고입니다. 나이든 사람은 배워서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앞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나 의료비도 점점 더 늘 텐데 무극보양뜸 하나만 익혀놓으면 온 가족이 걱정 없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선생 슬하의 1남3녀 중 둘이 침뜸을 공부한다. 딸은 미국 침구대학원에 유학중이고 아들은 남수침술원에서 함께 일하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1951년 우리나라 국민의료법이 공포될 때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는 의료업자로, 접골 침술 구술 안마술사는 의료유사업자로 나누어졌다. 질질 끌다 의료유사업자 자격시험 규정이 1960년에 생기기는 했으나 한번도 시행되지 못하고 다시 5·16을 맞는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료법을 개정하면서 의료유사업자 규정을 완전 삭제해버린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해방 후 정식 침구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구당은 물론 광복 이전에 침구사 자격증을 딴 사람이다. 현재 살아 있는 침구사가 100명 정도지만 거의가 연로해서 직접 시술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침구사법이 없어진 후로 그걸 새로 만들기 위해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장군들치고 저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군부대마다 찾아다니며 다친 장병들에게 침 놓고 뜸 떠주고 했거든요. 장군들이 힘이 셀 때 아닙니까. 멍석 깔고 지랄하는 것 빼고는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5공화국 때도 침구사 제도 통과가 문턱까지 갈 뻔한 적이 있었다. 1980년 당시 천명기 보건사회부 장관이 “침구사 제도를 부활하겠다”는 발표를 했었다. 너무 기뻐도 쇼크가 되는 법이다. 너무 좋아 가슴이 터질 것 같더니 심장의 화기운이 균형을 잃어 그는 그만 쓰러져버린다. 병원으로 옮겨져 40일을 산소 마스크를 쓰고 지냈다.
“정신을 잃었으면서도 ‘저혈압에 진통제를 놓으면 안 되는데 지금 진통제를 놓는구나’ 하는 식의 분별은 있었어요.”
6개월간 병원에서 심근경색 치료를 받았다. 심장의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죽든지 살든지 집으로 가겠다고 우겼다. 자신의 몸을 임상대상으로 놓고 침뜸을 하기로 결심하고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말한다.
“내게 뜸을 떠다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응급실에 가기 전에 뜸을 떴기 때문이다. 설령 내 명이 다한다 해도 고통 없이 갈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큰 효과이고 축복이니 걱정마라.”
예상대로 그는 살아났다. 뜸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건강의 본질은 병이 없는 게 아니라 인체의 치유능력입니다. 살면서 전혀 아프지 않을 수야 없겠지요. 아파도 가볍게 앓고 얼른 회복하면 그게 건강입니다. 뜸은 바로 인체의 치유능력을 높여주는 의술이에요. 혈행을 촉진하고 세포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고 신경 및 내장 기능을 조절하고 호르몬의 분비에 변화를 줍니다. 경혈에 자극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피부에 작은 화상을 입혀 일종의 가열 단백체가 생체 각 조직에 화학적 자극을 전달하도록 하거든요.”
우스꽝스럽게도 기껏 발표되어 그를 기쁨으로 쓰러뜨린 침구사 부활건은 나중에 까닭 없이 유보되고 말았다.
“왜 갑자기 유보됐는지 그 이유가 늘 수수께끼였는데 천명기 장관 사후에 밝혀졌지 않았습니까. 의사협회로부터 5억원인가를 뇌물로 받았다지요.”
그는 열한 살에 처음 침을 잡았다. 선친도 침을 놓았고 하나뿐인 형님도 침구사였다.
“우리 형님은 중풍을 특히 잘 고치는 명의셨어요.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 한다고 내가 그 짝이지요.”
의원이신 부친은 화제(약방문)만 낼 뿐 환자에게 약을 지어주지 않았다. 침과 뜸만으로 병이 잘 나으니 굳이 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약 짓는 약방은 따로 있었다. 의원은 침을 놓고 화제를 써주면 그만이었다.
“당시는 그야말로 의약분업이 아주 잘 돼 있었던 겁니다.”
선친이 따로 치료비를 받는 건 본 적이 없다. 가을이 되면 동장이 자루를 들고 다니면서 모곡을 걷어줬다. 있는 사람은 넉넉히 내고 없는 사람은 내지 않아도 좋았다.
“그게 바로 그 시절의 의료보험이었지요.”
따로 배울 필요도 없이 부친과 형님에게서 보고 들은 대로 그는 28세에 남수침술원을 개업한다. 그후 60년 넘게 한번도 침통을 놓지 않고 살았다.
“화타나 편작이 명의라고 하지만 나보다 오래 의원 노릇을 했을까요. 조선에는 허임이라는 걸출한 어의가 있었어요. 허임도 72세 이후로는 종적을 감췄다고 나와 있으니 아마 역사상 침을 가장 오래 놓은 사람이 내가 아닐까 싶어 요.”
사극에 나오는 허준이 약을 짓고 침뜸 시술을 동시에 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는 완전히 어긋난다. 그는 약의(藥醫)였고 허임이라는 침의(鍼醫)가 따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는 약의 허준과 침의 허임이 선조의 편두통을 함께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금이 “짐에게 침을 놓는 게 어떠한가” 묻자 노의(老醫) 허준은 “소신은 침 놓는 법을 모릅니다”라고 물러나고 대신 허임이 병풍 뒤에서 침을 놓는다는 기록이다.
허임은 자신이 일생 축적한 임상 경험을 모아 조선 최초의 본격 침구서인 ‘침구경험방’을 펴낸 걸출한 침의였다. 허준에 견주어 하도 묻혀 있는 인물이라 앞으로 구당 선생과 뜸사랑 회원들은 ‘허임 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 예정이다. 세부사항도 착착 만들어지고 있다. 그 일을 통해 침과 뜸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사랑을 높여나가는 게 목적이다.
침뜸에 관한 잘못된 속설이 있다. 침뜸을 동시에 하면 기운이 빠져 못쓴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구당 선생은 속 시원히 해명한다. 예전에는 침 만드는 사람이 귀했다. 침을 만들면 재수없다는 소문이 떠돌아 손 없는 날을 골라 금세공업자가 섣달 그믐날 하루만 침을 만들었다. 그러니 가는 침을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고 할 수 없이 대침을 썼다. 대침은 위험하다. 잘못 찌르면 신경을 손상할 수도 있고 복막염이 될 수도 있었다. 침에 녹이 슬 수도 있었다. 뜸도 크게 떴다. 커야 좋은 줄 잘못 알고 몸살을 앓을 만큼 크게만 떠댔다.
지금은 다르다. 현대는 제철기술의 발달로 값싸고 질 좋은 스테인리스 호침이 머리카락 굵기만큼 가늘게 생산된다. 쑥도 쌀알 반톨만하다. 힘들 게 전혀 없다. 경혈을 동시에 자극하면 더욱 효과적일 뿐이다.
경혈이란 인체의 오장육부와 경락의 기가 모이고 출입하는 곳이다. 우리 몸의 초인종인 셈이다. 침뜸은 몸의 급소인 경혈을 자극해 불균형과 이상을 바로 잡아준다는 원리다. 몸이 알아서 저절로 제 균형을 잡아가라고 죽비를 내리치는 것이다.
우리 몸 안에 에너지가 다니는 통로를 경락이라 부른다. 동양의학은 병이란 그 선로의 흐름이 고르지 못한 상태라고 본다. 그럴 때 가까운 역(경혈)을 찾아가 자극한다. 그러면 멈춰 있는 기운이 잘 돌아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락 이름은 다 뜻이 깊어요. 머리 가운데 있는 백회(百會)는 100가지 경락이 모여 있다는 의미지요. 이곳에 뜸을 뜨면 머리가 맑아져 집중력이 좋아집니다. 머리칼이 새로 돋기도 합니다. 예전에 백회에 뜸뜨고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해서 흔히 서울대 뜸자리라고도 불러요. 어깨 아래 고황(膏?)이란 아주 깊은 곳이란 뜻입니다. 병이 깊이 들었을 때 여기다 침을 놓습니다. 천종(天縱)이란 심장과 뇌라는 뜻이에요. 뇌나 심장에 병이 있을 때 사용하라는 자리입니다.”
구당 선생은 침뜸을 ‘종합의료기’라고 부른다. ‘이동병원’이라고도 말한다. 부러지고 잘라진 외과적 상처말고 내인성 질병은 어느 병이든 침뜸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걸 임상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특히 디스크와 당뇨와 중풍에 탁월한 효능을 나타내는 게 침과 뜸이다. 남수침술원은 환자들 사이에 흔히 ‘침 한번 집’으로 불린다. 침 한 번 맞으면 말짱해진다는 건데 물론 다 그렇진 않다. 오래된 병은 오래 다스려야 하지만 침 한번에 거뜬해지는 경우도 많다.
한번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상도동 자택으로 구당을 불렀다. 선거운동 하느라 수도 없이 악수를 하다보니 어깨 통증으로 팔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어깨 바깥쪽 견우혈에 침을 한 번 찔렀다. YS는 “듣던 대로 ‘침 한번 집’이 맞네” 하며 금방 악수를 청했다. 나중 YS가 청와대에 들어간 후에도 몇 번 가서 침을 놓아줬다. 침구사는 청와대를 뒷문으로 몰래 출입해야 했다. 효능을 눈앞에서 확인해도 침구술은 여전히 불법이었다. 노쇠한 몇 명만 빼면 지금 침구술을 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엄밀히 말해 무자격자라는 거다.
“의사가 침구를 활용할 수 없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남한뿐입니다. 의료 서비스가 개방되면 전통의학과 현대의학 사이에 쳐놓은 철조망은 얼마 못 가 무너져요. 그럴 때를 대비해 늦기 전에 의사, 한의사를 대상으로 제대로 된 침구교육을 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