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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시 바로알기

[정선통나무펜션] 2008. 7. 17. 02:44

B.C. 1000 전기 청동기 문화형성
  선사시대 원주민 거주
(청동기 시대 주거지 및 유물발견:조양동, 장사동, 도문동)
 
  예(濊) 소속
  고구려 익현현
551(?) 신라 진흥왕 12년. 고구려에서 신라 영역으로 편입
757 신라 경덕왕 16년, 익령현
 
995 정종 14년, 삭망도 익령현
1018 현종 9년, 동계 익령현
1221 고종 8년, 익령현에서 양주로 승격
1257 고종 44년, 양주에서 덕령현으로 강등
1260 원종 1년, 덕령현에서 양주로 회복
 
1397 태조 6년, 양주가 부로 승격
1413 태종 13년, 양주부에서 양주도호부로 바뀜
1416 태종 16년, 양주도호부에서 양양도호부로 바뀜
1618 광해군 10년, 양양현으로 강등
1623 인조 1년, 양양도호부로 회복
1688 숙종 14년, 양양현으로 강등
1697 숙종 23년, 양양도호부로 회복
1783 정조 7년, 양양현으로 강등
1792 정조 16년 양양도호부로 회복
1895 고종 32년, 양양도호부에서 양양군으로 바뀜
 
1914. 3. 1 양양군 12개 면 중, 군내면(부내면)ㆍ부남면ㆍ위산면이 양양면으로, 동면ㆍ남면이 손양면으로, 강선면ㆍ사현면이 강현면으로, 도문면ㆍ소천면이 도천면으로 통합됨으로써, 서면ㆍ현북면ㆍ현남면과 더불어 7개면으로 재편됨.(간성군과 고성군이 병합되어 간성군이 됨)
1919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이름을 바꿈
1937. 7. 1 토성면ㆍ죽왕면이 양양군에 병합
도천면이 속초면으로 개칭됨.
(면사무소가 대포리에서 속초리로 옮겨짐)
1942.10. 1 속초면이 읍으로 승격됨.(부령 제14조)
1945. 8.24 공산치하에 들어감
 
1963. 1. 1 속초읍에서 시로 승격(법률 제1176호)
1973. 7. 1 고성군 토성면 장천리, 사진리가 장사동으로 편입하여(13개동) ⇒ (대통령령 제6542호)
1983. 2.15 양양군 강현면 상복리 일부지역이 설악동으로 편입하여(법정동 14개동, 행정동 13개동) ⇒ (대통령령 제11027호)
1990. 4. 1 법정동 사진동과 장천동이 장사동으로 통합하여(법정동 13개동, 행정동 13개동)⇒(시조례 제1293호)
1998.10.17 '98년 동 통ㆍ폐합으로 행정동이 13개 동에서 8개동으로 조정되어 법정동 13개동, 행정동 8개동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음⇒(시조례 제1657호)
영랑동과 장사동이 영랑동으로,
동명동이 동명동으로,
중앙동과 금호동이 금호동으로,
청학동과 교동 일부가 교동으로,
노학동과 교동 일부가 노학동으로,
조양동 일부가 조양동으로,
청호동과 조양동 일부가 청호동으로.
대포동과 도문동과 설악동이 대포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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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시는   면적 : 105.25㎢   인구 : 8만 9461명(2003.7) 가구수 : 3만 3716세대(2003.7)

[자연환경]
시의 서쪽 설악산 부근의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주봉산, 청대산 등 연봉을 이루고, 대포동의 외옹치리 해안까지 임박해 있다. 하천으로는 설악산에서 발원한 쌍천이 양양군과 경계를 이루면서 하류에 약간의 평야를 형성하고, 미시령에서 발원하여 대소 지류를 합류한 소야천은 유로는 짧으나 유역에 기름진 소야평야를 발달시키면서 시의 중앙을 가로질러 청초호로 흘러든다.

시가지 북쪽과 중부 해안에는 석호인 영랑호와 청초호가 있고, 청초호 바깥쪽의 사취에는 방파제 시설이 되어 있어 청초호는 좋은 항만 구실을 하며, 특히 풍랑 때 어선의 대피정박지로 이용된다.

[인문환경]
동우대학을 비롯하여 고등학교 3개교, 중학교 4개교, 초등학교 10개교 등이 있고, 각급 행정관서 외에 방송국·도서관·등대·문화원·공연장·도립병원이 있다.

[교통]
속초시에는 철도는 없고, 도로교통이 편리하여 간성·양양·강릉 지역과 쉽게 오갈 수 있다. 영서(嶺西)지방과는 진부령, 한계령을 통하여 인제·춘천·서울 방면과 연결된다. 특히 용대리~미시령~속초시를 연결하는 도로가 확장·포장되었으며, 속초∼대관령∼서울 사이의 고속버스도 운행되고 있다.

해상교통은 속초항을 통하여 각 항구와 연락되고, 속초비행장을 이용한 서울과의 정기항공로가 개설·운항되고 있다.

2000년 4월 18일에는 속초항과 러시아의 자루비노항 간의 항로가 개설되어 중국과 최단거리 교통이 가능해졌으며, 중국의 훈춘·옌지를 거쳐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백두산 관광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또한 속초항을 통해 금강산관광도 이루어지고 있다.

 

 

<속초시 이름 유래>

 

속초 지명에 관해서는 "묶을 속(束)", "풀 초(草)"라고 써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는데, 영금정에 연관지어진 이름과 울산바위와 관련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영금정과 연관된 전설>

영금정 옆에 솔산이 있을 때 바다에서 포구를 들여다보면 그 솔산이 소나무와 풀을 묶어서 세워 놓은 것 같은 형태라, 풍수지리적으로는 속초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으로 소가 누워서 풀을 먹고 있는 형국이므로, 누워서는 맘대로 풀을 뜯지 못하므로 풀을 묶어서 소가 먹도록 해야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문헌상 유래>

《한국지명총람》에 보면 "속초리는 속새울, 속새골이라고도 했는데, 속새가 많은데서 유래했다는 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전국적으로 속새라는 풀이 많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 많으므로 속새를 한자로 표기하여 속초(束草)라고 하여 함께 사용되다가, 속초라는 지명만 남고 속새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도 나이 많은 토박이들은 속초를 속새라고 불렀음을 기억하고 있다.

속초시의 풍습 만천동 나룻배싸움, 논뫼호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
민속놀이: 복조리 설빔 쥐불놀이 줄다리기 등등

그 고장에서 내려오는특별한 이야기

<울산바위와 연관된 전설>

조물주가 금강산의 봉우리를 1만2천 개를 만들 계획으로 잘생긴 바위는 모두 금강산에 모이도록 했다. 울산땅에 있던 큰 바위도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는데 워낙 육중하여 지금의 울산바위 근처에서 하루를 쉬었다가 금강산에 가보니 벌써 금강산은 다 빚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울산바위는 하루를 쉬었던 곳에 머물기로 하였다.

그 후, 설악산 구경을 왔던 울산 고을 원이 신흥사의 중에게 울산바위는 원래 제 고을의 바위니 지세를 물라 하니, 해마다 지세를 물다 사찰의 형편이 어려워 지세를 주지 못하고 바위를 도로 울산땅으로 가져가라 하였다. 울산고을 원은 바위를 재를 꼰 새끼로 묶어주면 가져가야겠다고 하니, 이에 청초호와 영랑동 사이에 자라고 있는 속새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맨 후 불에 태우니 곧 재로 꼰 새끼처럼 만들어졌다.

그러자 울산 고을 원은 더 이상 지세를 내란 말도 바위를 가져가겠다는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 ·풀 초(草)"로 적는 지금의 속초로 불리게 되었다.

이상의 것은 모두 속초라는 한자 지명의 뜻에 '풀을 묶은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하고 있다. 모두 전설적인 얘기로 신빙성이 희박하다.

 

과거 속초리(束草里)에 속했던 지역이다. 속초(束草)도 조선(朝鮮)에는 소천면(所川面) 속초리(束草里)라는 한 동리였다.그러던 것이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들어와서 청초호(靑草湖)를 항구로 개발함에 따라 인접한 속초리(束草里)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1937년에는 면(面) 사무소가 대포리(大浦里)에서 속초리(束草里)로 옮겨지고, 면(面)의 명칭도 도천면(道川面)에서 속초면(束草面)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속초(束草)는 동리 이름이면서 동시에 면(面) 이름으로 변하였고, 그후 1942년 읍(邑)을 거쳐,1963년에는 시 (市)로 승격되었다.
그동안 인구 증가로 속초리(束草里)는 1942년에는 1구에서 4구까지로 나눠졌고, 해방 후에는 피난민의 증가로 인구가 더욱 늘어 3구에서 5구, 4구에서 6구가 분리되었다. 그러던 것이 시(市) 승격 후 1966년 동(洞)제 실시 때 속초리(束草里) 1구는 영랑동(永郞洞), 2구는 동명동(東明洞), 3구는 중앙동(中央洞), 4구는 금호동(琴湖洞), 5구는 청호동(靑湖洞), 6구는 청학동(靑鶴洞)과 교동(校洞)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논뫼호→청초호(靑草湖)
속새→1. 속초(束草)의 연혁(沿革), (4) '속초(束草)'지명의 유래참조.
속진(束津)→1. 속초(束草)의 연혁(沿革), (3) 일제시대(日帝時代) 이후의 속초(束草) 참조.
쌍성호(雙成湖)→청초호(靑草湖)
영랑호(永郞湖) : 속초시(束草市) 북쪽에 위치한 큰 석호(潟湖:砂嘴,砂洲 등에 의하여 바다의 일부가 바깥 바다와 분리되어 생긴 호수). 주위가 약8km이고 영랑동(永郞洞), 동명동(東明洞),금호동(琴湖洞), 장사동(章沙洞)으로 둘러 싸여 있다.1977년부터 동방원양주식회사(東邦遠洋株式會社)에 의하여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신라시대(新羅時代) 화랑(花郞)인 영랑(永郞)이 이 호수에서 풍류를 즐긴 까닭으로 영랑호(永郞湖)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1982년 속초시(束草市)에서 발행한 《설악(雪嶽)의 뿌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영랑호(永郞湖)의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신라시대(新羅時代) 화랑(花郞)이었던 영랑(永郞)이 동료인 술랑(述郞), 안상(安祥), 남석(男石) 등과 금강산(金剛山)에서 수련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에서 3일 동안 놀고 난 후 각각 헤어져 신라(新羅) 서울 금성(金城)으로 향하였다.그러나 영랑(永郞) 만은 이 호수에 와서 뱃놀이를 즐기고, 고기를 낚고, 풍류의 멋을 다하였다. 그런 후 사람들이 영랑호(永郞湖)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이것은 상당히 근거있는 얘기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卷) 제4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眞興王) 37년과 권(卷) 제47 열전(列傳) 김 흠운(金 歆運)전에 신라시대(新羅時代) 화랑도(花郞徒)들의 수행 방법으로「산수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는데, 먼곳이라도 다니지 않은 데가 없었다. (遊娛山水無遠不至)」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전국 산천을 순례하며 심신을 단련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기록된 화랑도(花郞徒)에 관한 단편적인 기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금강산(金剛山)과 동해안이 그들이 가장 즐겨 찾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또 현재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몇 안되는 화랑(花郞) 중 영랑(永郞)이라는 화랑(花郞)이 《삼국유사(三國遺事)》권(卷) 제3백률사(栢栗寺)에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서는 안상(安祥)을 준영랑(俊永郞)의 낭도(郎徒)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영랑(永郞)의 낭도(郎徒)에는 오직 진재(眞才), 번완(繁完) 만이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그 역시 내력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世謂安常爲俊永郞徒不之審也永郞徒唯眞才繁完等知名皆赤不測人也)」
물론 여기의 영랑(永郞)이 영랑호(永郞湖)에서 풍류를 즐겼다는 영랑(永郞)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현재 확인할 수 있는 영랑호(永郞湖)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유기(東遊記)》이다. 고려(高麗) 충정왕(忠定王) 1년(1349년)에 쓰여진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는 영랑호(永郞湖)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오래전, 적어도 고려시대(高麗時代), 아마도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 영랑호(永郞湖)로 불리어졌고, 그것은 분명히 신라(新羅) 화랑(花郞) 영랑(永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영랑호(永郞湖)는 신라시대(新羅時代) 화랑(花郞)들이 풍류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옛부터 많은 문인들이 시문을 남겼다. 현재 확인 가능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관동별곡(關東別曲)〉이란 경기체가(景畿體歌)로 유명한 고려(高麗) 후기 안축(安軸)의 시 2수가 전한다.

「저문 구름 반쯤 걷히니 산은 그림같고
가을비 새로 개이니 물결이 절로 이네
이곳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할 수 없으니
배위에서 노래 한 곡조 다시 듣노라.」
(暮雲半捲山畵
秋雨新晴水自波
此地重來難可必
更聞船上一聲歌)

「평평한 호수 거울인양 맑은데
푸른 물결 엉기어 흐르지 않네
놀잇배를 가는 대로 놓아 두니
둥실둥실 떠서 날으는 갈매기 따라가네
호연(浩然)하게 맑은 흥 발동하니
물결 거슬러 깊고 그윽한 데로 들어가네
붉은 벼랑은 푸른 돌을 안았고
옥동(玉洞)은 경주(瓊洲)를 감추었네
산을 따라 소나무 아래 배 대이니
하늘은 푸르고 서늘한 기운 이제 가을이네
연잎은 맑아서 씻은 것 같고
순채실은 미끄럽고도 부드럽네
저물녁에 배를 돌리려 하니
풍연(風煙, 멀리 보이는 광중에 서린 흐릿한 기운)이 천고(千古, 썩 먼 옛적)의
수심일세
옛 신선 다시 올 수 있다면
여기서 그를 따라 놀리라.」
(平湖鏡面澄
滄波凝不流
蘭舟縱所如
泛泛隨輕鷗
造然發淸興
소회入深幽
丹崖拘蒼石
玉洞藏瓊洲
循山泊松下
空翠凉生秋
荷葉淨如洗
박세滑且柔
向晩欲回棹
風煙千古愁
古仙若可作
於此從之遊

같은 시기일 고려(高麗) 후기의 문인 이곡(李穀)의 시 1수도 전한다.
「안정승(安軸)의 정회(情懷)는 황학(黃鶴)의 달이요(옛 사람의 시에 '黃鶴去不復返'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안축이 한번 가고 다시 못 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이생(李穀)의 행지(行止, 行動擧止의 준말로 몸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뜻함)는 흰 갈매기의 물결이네
이곳에 다시 온다 약속하기 어려운데
부질없이 관동(關東)의 한 곡조 노래만 듣네.」

(安相情懷黃鶴月
李生行止白鷗波
重來此地誠難必
空聽關東一曲歌)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구 사맹(具 思孟), 이 상질(李 尙質), 이 세구(李 世龜), 김 창흡(金 昌翕), 이 몽규(李 夢奎) 등 많은 문인들의 시가 남아 있고,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도 등장한다.

진성호(震成湖)→청초호(靑草湖)
청초호(靑草湖): 중앙동(中央洞), 금호동(琴湖洞), 청학동(靑鶴洞), 교동(校洞), 조양동(朝陽洞), 청호동(靑湖洞)으로 둘러싸인 속초시(束草市) 중앙에 위치한 석호(潟湖). 속초(束草) 시가지는 이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속초(束草)와 청초호(靑草湖)의 이름에 공통으로 '초(草)'자가 들어 있는 것을 보면,두 지명은 서로 관계가 있는 듯하며, 현재의 금호동(琴湖洞), 청학동(靑鶴洞), 청호동(靑湖洞)의 이름은 이 호수의 이름과 관련하여 지어진 것이 틀림없다.
동쪽이 바다와 트여 호수 북쪽이 속초항으로 이용되고 있다.일제시대 말기에 청초호(靑草湖)를 큰 항구로 개발하기 위하여 좁은 입구를 파내고 옆에 축대를 쌓아 큰 배가 드나들 수 있게 만들었고, 그때부터 속초(束草)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호수가 크게 오염되어 차라리 매립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으나 이 중환(李 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양양(壤陽)의 낙산사(洛山寺) 대신 청초호(靑草湖)가 관동8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기록될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쌍성호(雙成湖): 부(府) 북쪽 40리 간성군(杆城郡)과의 경계에 있으며 둘레가 수십리다. 호수 경치가 영랑호(永郞湖)보다 훌륭하고 예전에는 만호영(萬戶營)을 설치하여 병선이 정박하였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쌍성호:在府北四十里杆城郡界周數十里湖之形勝優於永郞湖昔置萬戶營泊兵船今廢)」
쌍성호(雙成湖)는 청초호(靑草湖)의 다른 이름이다. 민간측 기록인 《택리지(擇里志)》,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에는 청초호(靑草湖)로 기록되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읍지(邑誌)》 등 관청측 기록에는 모두 쌍성호(雙成湖)로 기록되었음이 주목된다. 청초호(靑草湖)의 또 다른 이름으로 진성호(震成湖), 논뫼호가 있다. 논뫼는 논산리(論山里)의 순수 우리말 이름이고, 논뫼호는 논뫼라는 마을의 앞에 있는 호수라는 뜻이다.
또한 조선시대(朝鮮時代) 《읍지(邑誌)》에는 용경(龍耕)이 기록되어 있다. 청초호(靑草湖)가 한겨울에는 얼음이 얼어 마치 논두렁 같이 되는데, 호수 밑에 사는 용이 갈아 놓은 것이라고 하여 이것을 용경(龍耕), 또는 용갈이라고 하였다. 이 고장에는 영랑호(永郞湖)에는 암룡, 청초호(靑草湖)에는 숫용이 산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남쪽을 향해 갈아 놓았을 때는 풍년이 들고,북쪽을 향해 엇갈이로 갈아 놓았을 때는 흉년이 든다고 하여,이것으로 다음 해 농사의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